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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러와 SF를 넘나드는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 시리즈의 시작

by dramagods99 2020.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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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와 SF를 넘나드는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 시리즈의 시작


우주 화물선 노스트로모호의 승무원 7명은 수만톤의 화물을 싣고 지구로 귀한 중에 있다. 그런데 한 혹성을 지나쳐갈 때 생명체의 발신파를 감지하고, 혹성을 탐사하게 된다. 승무원들은 내켜하지 않지만 탐사하지 않으면 돈을 주지 않겠다니, 어쩔 도리가 없다. 미지의 혹성에는 오래되어 썩어버린 우주선이 있다. 탐사원들은 우주선 내부를 조사하던 중, 정체불명 생명체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더 깊은 곳을 조사하던 케인은 여러개의 알과 같은 형태의 물체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자극하는 순간 공격을 받고 쓰러진다. 탐사원들은 그런 케인을 다시 우주선으로 데려온다.

이후 내용은 상상한 대로 흘러간다. 몸에 에이리언 알을 품은 케인, 그런 케인의 몸를 뚫고 태어난 에이리언, 그 에이리언으로 인해 한 명씩 죽어가는 승무원. 사실 지금 생각하면 뻔한 이야기 같지만 이 영화가 1979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뻔하지만은 않다. 1979년에 '인간의 몸 안에 알을 까서, 몸을 뚫고 태어난 후, 인간을 잡아먹는, 산성으로 된 피를 가진 생명체' 가 '우주' 에 존재할 것이라는 상상을 과연 몇명이나 했겠나. 발상에서부터 흥미로움은 폭발한다.


영화가 공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인상깊었다. 큰 공간적 배경만 보면 우주이지만 실제로 우주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정작 본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끝나는 건 모두 우주선 노스트로모호 안에서의 일이다. CG가 지금만큼, 아니 거의 발전하지 않았을 1979년에 외계생명체가 등장하는 영화를 찍는데 그 배경이 드넓은 우주 전체 혹은 작게 봐서 행성 하나라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구나 「에이리언」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긴장감이다. 관객이 언제 어디서 에이리언이 나타날 지 몰라 조마조마해야만 한다. 그래야 몰입도도 높고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영화를 관람할테니 말이다. 따라서 「에이리언」의 우주선이라는 밀폐되고 한정된 공간설정은 긴장감 조성에 훌륭한 장치로 작용한다. 우주 밖으로 도망갈 수도 없고, 복잡한 우주선 내부 어디에 에이리언이 숨어있는 지도 모른다. 도움을 청할 곳도 없고 무기라곤 화염방사기 뿐인 그 공간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여유로울 수가 있겠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대부분이 통상적으로 보통이라 부르는 일반 사람들일테니, 극한으로 설정된 공간에서 스릴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문에 나 역시 대한민국에 사는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이기에, 흐린 눈을 해가며 영화를 관람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리언」의 주인공은 에이리언이 아니다. 결국 에이리언은 죽게 되니까. 모든 영화에서 그런 건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는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주인공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바로 리플리와 존스다.

사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존스는 살아남을 줄 알았다. 왜냐하면 존스는 고양이니까. 고양이는 귀여우니 죽어서는 안 되고, 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감독을 원망할테니...그래서 존스를 살려둔 게 아닐까? 실제 영화 내에 에이리언도 존스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고 만다. 에이리언도 귀여움을 아는 게 아닐까? 에이리언도 고양이는 해치지 않는다! 라며 혼자만의 추측을 해본다. 또 한가지 더 마땅한 이유를 찾아보자면, 리플리가 너무 외롭지 않도록 존스를 남겨둔 것이 아닐까 싶다. 승무원 7명 중 혼자 살아남은 리플리는 한명한명씩 소중한 동료들을 잃었다. 동료들의 죽음에 슬퍼할 틈도 없이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 리플리의 곁에 보드라운 털을 가진 존스라도 없었다면 아마 리플리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 존스는 그렇다치고. 그렇다면 리플리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왜 생존자는 리플리여야만 했을까?

영화를 보면 답이 나온다. 명확하게 단정지어 말하기는 힘들어도 그냥 영화를 보면 리플리가 살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단 리플리는 이성적이고 뛰어난 판단력을 가졌다. 처음 탐사원들이 에이리언에게 공격을 받고 그 생명체가 붙어있는 케인을 다시 노스트로모호로 데리고 왔을때, 케인을 들여보내면 안 된다고 한 사람은 리플리뿐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을 공격한 생명체를 우주선 안으로 들이는 게 그리 좋은 판단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케인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소중한 동료이기에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힘들다. 동료가 위험하니 살려야한다는 감정에 쉽게 휩쓸린다. 결국 그 감정적 판단에 동조한 승무원들은 반대한 리플리를 제외하고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에이리언이 노스트로모호에서 케인의 가슴을 뚫고 태어난 후, 승무원들은 한명씩 죽음을 마주한다. 눈앞에서 동료가 끔찍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승무원들은 분노하고 두려워한다. 하지만 리플리는 침착하게 에이리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생각한다. 어떤 공포심이나 분노에 현혹되지 않고 꿋꿋이 현실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절망을 모른다는 점도 리플리의 생존에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리플리가 노스트로모호의 모선을 폭파시키고 비상 우주선에 몸을 싣는 순간 관객들도 함께 안도한다. 하지만 사라졌던 에이리언이 공간 한 칸 밖에 없는 비상 우주선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관객들은 절망한다. 리플리는 두려워하긴 하지만 절망하지는 않는다. 그 한 칸짜리 우주선에서도 어쨌든 포기하지 않고 침착하게 에이리언을 물리칠 방법을 생각하고 시행한다. 나였다면 에이리언을 발견한 순간부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다가 몇날며칠을 보냈을 것이다. 에이리언은 커녕 방에서 거미 한 마리만 기어나와도 공포심에 물들어 방을 버리고 마는 나로서, 리플리의 행동은 그저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좁은 우주선 한 칸에서 사람 여섯을 죽인 에이리언을 마주쳐도 리플리는 절망하지 않고, 되든 안 되든 일단 생각한 방법을 시도해서 에이리언을 우주선 밖으로 뻥 쳐내버린다. 이렇듯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고 현실에서 일어난 일만을 생각하는 리플리가 다른 인물들보다 생존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어디선가 「에이리언」이 훌륭한 여성서사의 영화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충분한 이해가 되었다. 영화가 나온 1979년에 SF영화의 여성 주인공은 흔치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리플리는 당당히 「에이리언」의 주인공이 되었다. 물론 앞서 말했듯 살아남았기 때문에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동료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도 맞고, 어쩌면 운이 좋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에이리언을 저 멀리 날려버린 것은 오로지 리플리 혼자의 힘으로 해낸 일이다. 「에이리언」은 여성서사 영화로 여겨질만한 수많은 해석들이 있다. 에이리언 머리 모양이 남성의 성기모양과 비슷하다거나, 에이리언이 인간을 공격해 숙주로 삼고 인간 가슴을 뚫고 태어나는 것은 강제된 임신과 출산을 빗댄 것이라는 등. 다시 한번 1979년에 세상에 나온 영화라는 사실에 놀란다. 하지만 나는 이런저런 해석들을 다 제쳐두고, 단순히 리플리라는 인물 한명만 보더라도 「에이리언」이 당시 사회의 틀을 깬 뛰어난 여성서사 영화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도 충분히 이성적이고 강한 정신을 가지고 외계인과 맞서 싸워 생존할 수 있다! 실로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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