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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키워준 사람이 엄마인가, 낳아준 사람이 엄마인가? 나의 마더. I am Mother 영화 리뷰.

by dramagods99 2020.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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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준 사람이 엄마인가, 낳아준 사람이 엄마인가?
이 주제는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다양한 잣대들을 가지고 있다. 부모 없이 태어난 고아들이나 어린 나이에 입양된 아이들이 커서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찾아가는 스토리 등은 영화나 소설, 각종 다양한 매체에서도 많이 소개되고 있는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특징은 아무래도 2족보행을 통한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것과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 그리고 이성과 감성을 가진다는 것인데 늑대는 아예 이런 점들을 가르쳐줄 수가 없다.하지만, 영화 속 마더는 다르다.

로봇 마더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고, 인간의 표정도 없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이성과 감성을 갖추고 있다. 특히 기본 교양이나 각종 생리적인 현상들, 수많은 호기심들을 이 로봇은 다 해결해줄 수 있다. 심지어 인간들이 느끼는 피로와 힘든 감정, 짜증나고 싫은 감정 등 부정적인 것조차 다 배제된 100% 교육된 엄마의 모습으로 로봇은 시스템화되어 있으니, 이 엄마 아래에 자라난 아이는 완벽해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성품은 타고난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
성선설, 성악설, 성무성악설.
고등학교 시절에 윤리 시간에 배웠던 내용들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선한가, 악한가, 그런게 없는가.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나, 최근 박사방이나 n번방 사태 등으로 인해서 거의 살인에 가까운 디지털 성범죄 등을 저지르고 있는 조주빈 같은 사람들은 과연 태어날때부터 악했을까?



영화 나의 마더에서 딸은 로봇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심지어 의술까지도. 하지만 기술적인 것들을 배우는 것은 로봇도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윤리이다.


영화 속에서 재미있는 테스트가 하나 나온다. 다섯명의 특정 장기가 필요한 위독한 사람들, 그리고 그 장기가 온전한 위독한 기증자. 한 명의 기증자가 희생한다면 나머지 다섯명을 살릴 수 있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문제만을 가지고 우리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밴담의 양적 공리주의를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 의견이라면 우리는 한 명을 희생시키고 다섯명을 살리는 선택을 할것이다.

하지만, 딸은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만약, 살릴 수 있는 다섯명이 범죄자라면? 그리고 희생당할 한명이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칠 고귀한 위인이라면?

문제가 달라졌다.
단순히 프로그래밍화 되어 있는 로봇은 이런 결정을 할 수가 없다. 양적 공리주의 입장이라면 한명의 희생으로 다섯명을 살릴것이다. 하지만 인간 한 명 한 명의 고귀한 생명의 가치를 생각하는 칸트의 입장이라면 쉽게 결정내릴 수 없을 것.

이게 인간과 로봇의 차이가 아닐까.

칸트는 기본적으로 생명과 행복의 양이 아니라 바로 생명과 행복의 질을 문제로 삼는다. 바로 거기서 쾌락계산 하에서 행복과 생명을 양화하고 그 질을 충분히 묻지 않는 공리적 행복주의를 극복하고, 인격적 존엄으로 채워진 삶의 방식을 도덕적인 '생명의 질'로서 고구하는 칸트의 생명윤리의 지평이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생명의 존중과 존엄에 대한 칸트의 입장은 소여로서의 하늘이 준 생명을 그대로 절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소여의 생명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즉 다름 아닌 자기결정적인 삶의 방식에서 도덕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vgl. KU, Ⅴ 395Anm.]. "사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사는 한에서 존경할 가치가 있도록(ehrenwert) 사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딸은 많은 사람들을 만날 기대를 하며 외인과 함께 도망친다 소위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다. 하지만 딸은 새로 태어날 아기가 걱정되어, 밖으로 나가서 안전함이 확인 된다면 다시 돌아와서 아기를 데리고 오겠다고 한다.

하지만, 밖은 전혀 안전하지도, 쾌적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진짜 현실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딸은 다시 되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이 영화 쉽지 않다.
구구절절 상황 설명을 하는 영화도 촌스럽지만 이 영환, 조금은 더 정보 노출이 되었으면 좋겠다 싶다. 그러기에 일단 끝까지 다 봐서 전체적인 틀을 잡은 뒤 다시 한번 보았다. 그제서야 여러가지가 제대로 보였다.
처음 볼땐 A의 시선으로.. 보이던 것이 두번째 보면 비로서 제대로 된 B의 시선으로 보이는 것.
두번을 보면 그 영화적 매력 포인트가 다르다.
그러기에 처음에도 나름 재미있게 봤긴 하지만 두번째는 더 흥미롭게 봤다. 처음볼때 저게 복선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지점을 확인하는 재미가 있고 두번째엔 처음에 미처 못보고 지나갔던 곳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오직 두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로 이렇게 영화보는 사람의 감정을 쥐락펴락 하기 쉽지 않을테니 영화적 완성도는 비교적 합격점.
헌데 여성관객 입장에선, 영화의 줄기가 되는 설정에 참 마음이 상한다.
스포일러가 되기에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큰딸은 살림밑천'이라는 건가. 여성의 뛰어남을 고작 이렇게 써먹냐고.

요즘 워낙에 영화적 기술이 발달되었기에 웬만히 기술력 들어간 거 그러려니 하는 정도지만 이 영화에서 엄마로 설정된 로봇의 움직임은 유려하고 아름답다.

영화는, 더 이상 인류는 생존하지 않는다는 걸 알리고 시작한다.
이후 배아 상태였다 태어나는 조그만 여성아기. 영화는 초반 이 아이가 로봇엄마와 크는 모습을 따뜻하게 그린다. 물론 처음 볼 땐 '따뜻하게' 느꼈다. 헌데 두번째 보니 여기에 잔혹함이 숨겨져 있었다.
결국, 영화 처음에 등장하는 아기와.. 귀여운 유년기의 아이와.. 영화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던 소녀가.. 결국 다 다른 사람이라는 것.
배아 1호인 아기는 아기상태에서 버려졌고, 2호는 유년상태까지는 살아남았지만 성에 차지 않는 엄마 로봇에 의해 소각당하고.. 3호가 로봇마더의 각종 테스트를 이겨내 소녀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 처음 볼 때, 소녀의 이름이 없는 게 이상했다.
늘 딸..이라고 불리우던 것. 뭔가 여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을 듯 했는데 역시나.. 이들이 분명 로봇마더의 딸인건 맞는데 고유의 이름을 가질 수 없는 별개의 인물이기에 그저 도터(daughter) 였던 것이다.
강력하게 복선으로 깔아주던 건 또 있다.
벙커안의 소녀는 밖에서 온 여자를 만나면서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로봇마더와 여자 중 진실을 말하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그때 영화는 이 두 여자를 묘한 구도로 잡는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두 여자가 아주 비슷한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한다. 거의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수준(머리색에 머리모양 옷차림.. 손의 위치까지 아주 흡사하다)
아 저 여자가 단지 그저 우연히 밖에서 온 여자가 아니구나. 싶어 저 외부여자를 주목하게 하는 이미지 였는데 결국 한 엄마를 가진 두 딸이라는 것의 복선이였다.

1차 관람이, 누가 선이고 악인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스릴러 라는 장르안에 담아 재미를 찾는 과정이였다면, 2차 관람은 주인공 소녀가 변모하는 과정을 담은 드라마를 보는 재미다.
헌데 난 끝까지 보고 마음이 상했다.
앞의 두 언니의 희생을 딛고 3번째 소녀/여자는 로봇엄마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차근차근 교육받은 결과로 의과 수술까지 할 수 있을 만큼 지적인 면을 채웠고 벙커밖의 언니를 통해(물론 이건 로봇 엄마의 계획하에 이루어진 일이지만) 윤리적 문제와 담대함에서까지 합격점을 받는다.
그러자 로봇엄마가 한 일은 동생을 만들어 준 것.

배아를 꺼내 하루면 아이로 탄생시킬 수 있을만큼 손쉬운 일을 왜 소녀가 거의 성년이 다 되어서야 시작했을까. 심지어 곧 남자 동생들을 줄줄히 태어나게 해줄꺼라는 대사까지 나오고. 소녀가 어렸을때 최소 2년에 한명씩만 동생이 태어났어도 소녀는 인간들과 부대끼며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살았을텐데 말이다.
이유는 하나다. 소녀가 엄마노릇을 할 수 있을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엄마가 되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하는 대사까지 나오지 않나.
결국 이 소녀는 새로운 인류를 보살필 엄마로 길러진 것이다. 이제 줄줄히 태어날 '새로운 인류 남자들'을 보살필 엄마로 말이다.
오죽하면 이 소녀의 단호한 얼굴을 엔딩으로 잡을때 이 영화의 제목인 <I Am Mother>가 딱 뜰까.
이 영화의 제목을 명확히 우리말로 다시 달자면 바로 <엄마의 탄생>일 것이다.
어쩐지 동생이 태어나자마자(아니 태어 나기도 전부터) 이상하리만큼 미친듯이 모성애를 발휘한다 싶더니.
아 참~ 왜 여성을, 그것도 우수한 엘리트 여성을 이렇게 모성의 틀에 가둬놓지 못해 안달일까.

이 영화에서뿐 아니라 다른 영화에서도 바다는 실내 혹은 좁은 곳에 갇힌 답답함의 상대적 의미의 메타포도 많이 쓰인다. 하긴 바다라는 게 인간의 스케일로 만들만한 작품이 아니지.
사실.. 인간의 스케일이 아닌걸로 치면 높디 높은 산도 있을텐데 늘 영화속 캐릭터들를 매혹시키는 건 '바다'다.

쉽지 않은 주제라 차분하게 감상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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