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님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
이책은 중요한 통찰을 지닌 책이라는 점에서 아주 긴요하다. 소위 요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라는 이름으로 문화계에서 출발해 사회 전체에 맹위를 떨치고 있는 사회적 흐름에 대한 고찰이다. 최근 2~3년 동안 여러 방향에서 언급되면서 사람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용어가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좀 낯선 감이 있어서 PC가 무엇인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책으로 보인다.
게다가 아주 폭넓은 자료를 인용하면서도 글에서 순발력과 재치를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읽는 동안에 지루할 틈이 없다. 저자 스스로 자신의 지식을 뽐낸다기 보다는 인터넷과 언론 등 여러 곳에 너절하게 놓인 자료들을 엮으면서 유머러스하게 논조를 이어가려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물론 이게 PC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에겐 불편하게 읽힐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노 우리나라에서 82년생 김지영이 흥행한만큼 이 책도 흥행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면에서 제목과 표지를 잘못 고른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뜻에서 표지와 제목을 바꿨다면 역시나 또다른 PC주의에 굴복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몇몇 대목이 핵심적이라 인용하며 감상해보련다.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까봐 아무도 "다양성은 소중한 가치"라는 주장을 비판하지 못한다. 그러나 다양성은 그것이 낳을 결과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누리는 지적 사치다. 다문화사회는 본질적으로 갈등에 취약하다. 그 때문에 인종별, 문화별로 분쟁과 갈등을 해결하는데 주력하는 정부관료 집단이 늘어나고 사회적 재원과 에너지가 엄청나게 소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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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명료하게 말했듯이, 진실이 없는 곳에는 오직 권력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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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이 비판하는 대상에게서는 가치, 권위, 타당성, 명분을 내세우고 이해받을 권리를 박탈하는 한편, 사실상 하찮은 문제는 신조어로 화려하게 치장해 심오한 의미를 지닌 진지한 이론으로 격상시킨다.
36~37쪽의 내용이다. 비판이론이 포스트모던의 한 축이 될 정도로 비판을 옹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내세우는 모종의 가치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비판도 용납치 않는 PC주의의 한 흐름을 잘 드러낸다. 다문화사회가 본질적으로 갈등적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면서 다문화는 모두가 실천하고 지켜야할 숭고한 이상향이 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런 현실에서 PC주의가 어느 새 니체가 말하고 있는 권력이 된 셈이다.
특히 인용부의 마지막에 나오는 '신조어로 화려하게 치장'한다는 부분이 무척이나 와닿는다. 운동권의 논리 또는 요즘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비롯해 일련의 좌익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들 나름의 논리를 묘한 표현과 언어로 포장한 티가 난다. 예컨대 유시민의 '어용론'이 그렇다. 어용이라고 선배들을 전부 싸그리 매도하다가 본인이 하는 어용은 무언가 그럴듯한 구석이 있을 것처럼 포장한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용어들 가운데 '나눈다'는 표현도 그렇다. 무언가 나누는 것은 차지하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느낌을 주지만, 그 본질과 현실은 공허하다. 권력을 나눈다는 식의 주장이 한 때 정치권을 화려하게 뒤덮었지만 결국 선출된 사람과 선출되지 못한 사람이의 권력은 나눠지지 못한다는 게 결론이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만의 문제라 보기도 어려운게, 사실의 차원에서 권력은 나누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특히나 선출되지 못한 정당성이 취약한 누군가에게는 특히나.
종종 사회나 학교에서도 각종 위원회를 구성한 뒤에 거기서의 결정엔 일말의 민주적 정당성이 있을 것이라는, 혹은 일말의 협의와 그로 인해 협치가 깃들었다는 느낌을 주고자 노력한다. 이른바 학교민주주의의 한 축으로서 의사결정의 민주화라는 미명하에 각종 위원회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각종 위원회의 운신의 폭은 생각보다 좁으며 오히려 의사결정을 더디게 하거나 특정인의 입김이 더 강하게 작용할만큼 위원의 전문성 내지는 의지가 빈약하게 된다. 워낙 많아서.
서구문명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문명들과 비교 평가해야 타당한데 포스트모더니즘 좌익이 권력을 잡았을 경우에 구축할 가상의 이상향과 서구문명을 비교한다. 마르크스주의 이상향은 이를 추구한 마오쩌뚱, 스탈린, 폴 포트, 가스트로 등 모든 정권을 통해 참담한 실패로 판명되었다. 1억 명 이상이 그 이념 때문에 죽었는데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한가?
나는 선하므로 내가 권력을 잡으면 다르리라는 생각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신념이고 그런 신념을 지닌 인간은 반드시 독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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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좌익이 추구하는 유토피아와 비교하면 서구문명은 끔찍한 체제일지 모르지만 유토피아를 구축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초래할 체제보다는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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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인종불평등을 명분으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고 레닌, 스탈린, 마오쩌뚱, 폴 포트는 평등을 명분으로 1억 명 이상을 학살했다.
근래 들어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적 현상이 된 모더니즘에 대한 멸시에 대한 일침이다. 오늘날의 과학 기반 문명의 풍요와 인권의 확대를 가져온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이 대게는 이런 식이라는 거다. 이전의 유럽식 봉건주의나 중화사상의 천하적 세계관, 그 밖의 여러 노예제와 비교하면서 근대 이후 서구 문명이 지닌 장점을 새기기 보다는, 어떤 꿈과 같은 이상을 그린 뒤에 서구 문명이 그런 이상을 이루지 못하기에 폐기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다.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 순간 서구 문명에 세뇌된 저열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식이다.
실제 핵심적인 내용은 이어 나오는 공산주의와의 비교가 아닐 수 없다. 이상을 추구하고 자신과 자신의 집단만이 이상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 혹은 속이는 자들이 실제로는 막대한 인명피해로 이어졌다는 거다. 흔히 극우라 알려진 히틀러의 전체주의도 그렇지만, 레닌과 스탈린, 마오쩌둥, 폴 포트의 대량학살이 역시나 그랬다. 종종 알려지지 않고 배우지 않지만, 세계사의 유래없는 대량학살, 특히나 근현대사에서 이뤄진 학살의 배경엔 이념적 이상을 지향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서구문명을 짖밟는 기행은 선뜻 이해되기 어렵다. 물론 서구문명이 완전무결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나, 마치 대안적인 이상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현 기득권이 나머지를 압제하고 있다는 식의 접근은 언제나 생경하다.
볼테르(Voltaire)는 "누가 당신을 지배하는지 알려면, 비판이 허락되지 않는 대상이 누군지 알아내면 된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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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간적 공간적으로 접촉한 적도 없는 모든 사회에서 젠더 역할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젠더에는 구체적인 사실을 근거로 한 본질적인 상수(常數)가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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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명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며 쿠바의 독재자 카스트로의 앞잡이이자 동성애자들을 무자비하게 총살한 체 게바라를 영웅으로 여겼다.
젠더에 대해 나날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송곳 같은 글이 쏟아진다. 우리나라는 덜한 편이지만, 소위 인권선진국이나 서구사회에서는 젠더라는 것, 사회적 성이라는 게 단순하게 남과 여로 구분되지 않으며 다양한 젠더가 존재하며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남과 여로만 구분하는 일련의 표현과 제도 등 모든 것을 부정하고 해체하고자 한다. 종종 외국의 공공기관이나 다중이용시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젠더 이용 가능한 화장실이 대표적인 예다.
속칭 젠더감수성이라는 이야기로 치장하는 부분인데, 이에 대한 사실에 근거한 반론이나 그 어떠한 형태의 비판도 금지된 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동성애나 양성애, 무성애나 트랜스젠더와 같은 젠더 유동성을 정상적이지 못한 상태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혐오 발언이라며 재갈을 물리는 꼴인데, 위 인용구 가운데 부분에 드러나듯, 만나고 교류한 적 없는 수없이 많은 태곳적 문명들이 대게 유사한 젠더를 수립해왔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런 의견 제시조차도 요즘은 사실상 법적으로 금지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걸 보면 우리는 속칭 젠더감수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사는 모양이다.
위사진에 두여성의 공통점은 철저하게 소수자 우대정책으로 득을 본 인물들이다. 위에 사진은 백인이면서 수년간 흑인이라고 속이고 아래 여성은 자신이 인디언부족의 후손이라고 속이고 지금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까지 하고있다. 재미있는것은 유전자 검사에서 미국 백인에 평균보다 높은 백인 유전자 결과가 나왔다. 다시말해 백인중에 백인이다. (참고로 트럼프는 이여성을 포카혼타스로 부르고있다)
이 정책으로 미국흑인에 범죄율과 미혼출산만 늘어났다.
40년간 독재를 하면서 수많은 국민들을 고문하거나 처형했고 인권을 짓밟았다는 이야기는 그냥 넘어가기 일쑤다. 그 대신 물질에 집착하는 자본주의가 만연한 진부한 세상에서 쿠바인들은 독자적인 노선을 택해 독특한 문화를 지켜낸 매우 행복한 국민들이라 칭송한다.
근래에 <트래블러>라는 TV프로그램도 있었지만, 류준열이라는 배우가 쿠바를 여행하면서 한사코 이야기하는 내용이 위 인용구에 적나라하게 비판된다. 근래 들어 쿠바에 대한 여행에 대해서 또는 쿠바에 대한 문화를 소개하는 텔레비전의 논조는 언제나 낭만적이다. 그들은 멋진 해변에서 음악에 춤을 추고, 낯선이들과도 자연스레 어울려 술을 기울이고, 무상의료 속에서 자본주의에 굴복하지 않는 멋진 나라.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못하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다. 멋지게 올드 카를 운전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못살고 어렵게 진작 폐차되었어야할 차를 간신히 고쳐 탄다고 보는 게 정확할 거다.
시리아 난민 미스테리
1. 아무도 부유한 이슬람국가로 가지 않고, 부유한 이슬람 국가에서 받지 않는다.
2. 시리아 난민의 70%는 시리아를 통해 서유럽으로 가려는 난민 아닌 경제이민
3. 인류애 넘치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0명을 받아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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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규모가 비대해지고 이질성이 높아지면 분열 실책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관료들에게 통치 받는 현실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다문화정책은 좌익의 모순을 보여준다. 좌익은 평등과 해방이라는 이상을 추구하면서, 무슬림 사회 내에 존재하는 불평등과 억압을 외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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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약자를 보호해왔는데, 그 약자가 무슬림 가정 내의 여성과 어린이인 경우에는 외면한다.
난민에 관하여서도 문재인 정부 초기에 뜨겁게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이뤄진 건 거의 없고, 우리의 현실이 위 인용구에 비춰볼만하다. 종종 북유럽이나 독일과 같은 사회민주주의국가들을 칭송하기 바쁘지만 그 속살은 처참하니까.
사실 이주제는 광범위해서 이번 포스팅으로 다 다루지는 못한다.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를 구매해서 읽어보시길 바란다.
아무튼 한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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