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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오펜하이머는 종전을 가져다준 미국의 영웅이자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

by dramagods99 2020.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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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는 종전을 가져다준 미국의 영웅이자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


진정한 과학자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인 1939년 9월, 루스벨트 대통령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저명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보낸 편지였다.

적국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해 세계를 제패할지 모르니 미국이 독일에 앞서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루스벨트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고, 1942년 6월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맨해튼 프로젝트'가 발족된다.

프로젝트의 지휘는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물리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맡았다.

그가 달성해야 할 과업은 극비리에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오펜하이머는 192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닐스 보어와 1927년 수상자인 아서 콤프턴 등 노벨상 수상자 21명,

그리고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3000여 명의 과학자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독일계 유대인인 오펜하이머는 나치에게 희생당한 수많은 유대인들을 보며 가슴 아파했다.

때문에 더 이상 그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자폭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45년 7월 16일 5시 30분, 미국 뉴멕시코주 앨라 고모도 부근 사막에서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인 트리니티 테스트가 시작된 것이다. 폭발 후 모래가 녹아내리면서 깊이 3m, 직경 330m의 구덩이가 생겨났다.

또한 폭발의 충격은 160km 밖에서도 감지할 정도였다. 실험은 대성공이었고 인류는 핵시대에 진입하게 된다.

당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미 항복 상태의 독일 대신 유일한 교전국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사상 첫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원자폭탄은 반경 3km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14만 명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이어 3일 뒤에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7만 명이 사망했다.

가공할만한 위력으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알렸고 전 세계를 공포로 뒤엎었던 제2차 세계대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오펜하이머는 종전을 가져다준 미국의 영웅이자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며 단숨에 유명 인사로 부상했다.

그리고 학자로서 최고의 권위를 얻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장, 대통령 직속기관인 원자력위원회의 의장 등을 맡으며 미국의 중요 정책 결정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원자력위원회 의장으로 있던 오펜하이머에게 수소폭탄 개발 지시를 내렸는데 뜻밖에도 그는 결사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다.

소련과 냉전 상태에 있던 미국은 원자폭탄보다 더 파괴력 있는 수소폭탄 개발에 열을 올리던 참이었다.

미국 정부는 국익에 반대한 오펜하이머를 소련의 스파이로 의심하여 청문회에 소환했다.

그가 공산주의자로 소련의 명령을 받아 국가 기밀정보를 누설했고 또한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1954년 4월 12일 청문회에 나선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도, 소련의 스파이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또한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한 것은 핵폭탄의 위험성을 인지했기 때문이라 반박했다.

그러나 부인 캐서린과 동생 프랭크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인 버클리대학의 불문학 교수 하콘 슈발리에까지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는 더욱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언론 역시 오펜하이머를 파렴치한 사상범으로 몰아갔다.

4주에 걸친 청문회 끝에 오펜하이머에게는 공산주의자, 국가 기밀 정보 누설 혐의, 수소폭탄 개발을 지연시킨 혐의는 찾을 수 없으나 잠재적 기밀 누설원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과거 오펜하이머는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생각에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자 자신이 엄청난 재앙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죄책감에 빠진 그가 신경 쇠약에 시달이는 와중에 수소폭탄을 개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는 수소폭탄이 원자폭탄보다 더 큰 재앙을 가져올 거라 판단했고 때문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나는 세계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었다."

그는 늘 자책하며 과학자로서 저지른 오류를 수정하고 인류에 속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잃어가면서 핵무기 개발을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후 세계 곳곳에서 핵무기가 개발됐고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1967년 후두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자신을 책망하며 살았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했고 역시 인류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까지 소신과 신념을 지켜갔던 그는 누구보다 더 인류를 사랑한 진정한 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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