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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좋아

전설의 비틀즈의 시작은?.?.?그리고 전설을 만든사람들

by dramagods99 2020.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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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 비틀즈는 유명해지기 전에 브라이언 엡스타인이라는 특별한 인연을 만났다.

그는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천부적인 재능과 비범한 잠재력을 알아보았다.

비틀즈의 매니저가 된 엡스타인은 가장 먼저 멤버들이 늘 입고 다니던 청바지 대신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도록 했다.

여기에 머리까지 깔끔하게 정리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대형 음반 제작사들은 여전히 비틀즈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엡스타인은 자신만만했다. 사업 수완이 좋았던 그는 비틀즈를 어떻게 뒷받침해야 할지, 어떻게 키워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뮤지션이 아니어서 음악에 대해서는 조언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조지 마틴을 찾아갔다.

마틴 역시 재능이 뛰어난 음악가였다. 어렸을 때 독학으로 피아노를 친 그는 악보를 보지 않고 듣기만 해도 클래식 음악을 뚝딱 연주해 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영국 해군의 항공부대에서 비행기 조종을 했다.

종전 후 음악학교에서 작곡, 지휘, 피아노와 오보에를 배운 그는 1955년에 스물아홉 살의 나이로 EMI에서 가장 젊은 음악 감독이 되었다.

마틴은 처음 비틀즈의 데모 앨범을 받았을 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듣는 순간 이들의 음악이 이전에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형식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당장 엡스타인에게 전화를 걸어 테스트 녹음을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1962년 6월 6일, 마틴과 비틀즈가 EMI의 런던 녹음실에서 첫 번째 녹음을 시작했다.

마틴은 비틀즈가 부른 <러브 미 두 Love Me Do>와 <PS, 아이 러브 유 PS. I Love You>를 매우 특별하게 편곡하고 아름다운 화음을 넣어 더욱 빛나게 만들어 주었다.

이는 이후에도 비틀즈를 대표하는 특징이 되었다.

당시 마틴은 비틀즈의 드러머 피트 베스트가 이름과 달리 최고가 아니며 그들의 음악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비틀즈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1962년 8월 16일, 링고 스타를 비틀즈의 새로운 드러머로 영입했다.

두 싱글의 녹음에 굉장히 만족한 마틴은 비틀즈의 첫 정규앨범을 제작하기로 했다.

녹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단 11 시간 만에 끝이 났다. 이 앨범 <플리즈 플리즈 미 Please Please Me>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영국 팝 역사에서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존 레논은 이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조지 마틴은 초창기 몇 년 동안 우리를 지금의 우리로 만들었죠."

엡스타인이 비틀즈의 행운이었다면 마틴은 그들의 멘토였다.

엡스타인은 비틀즈가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인 것을 알아보고 마틴을 소개했고, 마틴은 그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 하늘로 날아 올렸다.


멘토로서 마틴의 탁월한 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그는 비틀즈의 음악에 클래식 음악의 요소를 더했다.

비틀즈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게 하는 등 레논과 매카트니의 머릿속에 있는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둘째, 마틴은 실험적인 녹음 기교를 다양하게 시도해서 비틀즈의 음악을 일반적인 록 음악이 아닌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그가 비틀즈의 음악에 시도한 모든 일은 전 세계 팝 음악 시장의 이정표이자 음반 업계의 분수령이 되었다.

단순히 비틀즈라는 밴드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록 음악의 방향을 바꾸고 그 범위를 확대한 것이다.

비틀즈는 총 열세 장의 앨범을 냈는데, 그중 열두 장을 마틴이 제작했다.

그가 제작하지 않은 앨범이 바로 1970년에 발표한 <렛잇비 Let It Be>다. 그런데 이 앨범을 녹음하면서 레논과 매카트니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겼다.

이전 같으면 엡스타인이 두 사람을 다독여 화해시켰겠지만 그는 이미 1967년 8월 27일, 서른세 살의 나이에 약물 과다로 요절한 후였다.

엡스타인도 없고 마틴도 없이 스스로 제작한 이 앨범은 공전의 히트를 쳤지만 멤버들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고 말았다.

이후 매카트니는 마틴이 없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다시 그에게 다음 앨범 <애비 로드 Abbey Road>의 제작을 부탁했다.

하지만 레논과 매카트니는 이미 물과 불처럼 상극이 되어서 계속해서 사사건건 부딪쳤다.


결국 마틴은 아주 기묘한 결정을 내렸다. 앨범을 더블 A 면으로 제작해서 한쪽은 매카트니에게, 다른 한쪽은 레논에게 주어 각자 원하는 음악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비틀즈가 해체되면서 <애비 로드>는 결국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사람들은 무대 위의 가수만 볼 뿐, 무대 뒤에 선 제작자는 눈여겨보지 않는다. 마틴은 음악잡지 <롤링스톤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들이 가진 모든 재능을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나올 수 있도록 했죠.

제작자로서 나는 가수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은 각자 달라요. 레논은 자유분방하고, 매카트니는 조리 있고 명확하죠.

레논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매카트니는 행동력이 뛰어납니다.

또 레논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잘하지 못하지만 매카트니는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해요.

이처럼 가수들의 생각과 태도, 성격, 마음가짐을 모두 정확히 알아야만 해요."

조지 마틴은 최고의 팝 음악 프로듀서다. 그는 비틀즈가 해체한 후에도 매카트니, 셀린 디온, 마이클 잭슨 등의 앨범을 제작했으며 모두 크게 성공시켰다.

매카트니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조지 마틴은 마치 오래된 신발 한 켤레 같아요. 신었을 때 아주 편안하고 발이 조금도 아프지 않은 그런 오래된 신발이오.

무슨 말인지 알 거예요. 그는 내가 만난 가장 훌륭한 음악 제작자입니다."

2016년 3월 8일, 조지 마틴은 아흔 살의 고령으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는 팝 음악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자신의 죽음으로 그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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