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슈따라가기

성수대교 붕괴사건!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받은 그날. 1994.10.21

by dramagods99 2020. 10. 21.
반응형

성수대교 붕괴사건!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받은 그날.


사건1994.10.21
1994년 출근길 차량들로 붐비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버스 등 차량 10여 대가 추락해 중고생 9명을 포함, 모두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 성수대교는 1979년 10월 16일 준공한 한강의 11번째 다리로, 붕괴 원인은 형식적 안전 점검과 관리 소홀. 이 사건으로 공공시설에 대한 일제안전점검이 실시됐다. 사고발생 2년 8개월 만인 1997년 7월 3일 차량 통행 재개.


1. 성수대교 붕괴사건이란?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의 중간 부분이 붕괴되어 많은 인명이 희생된 사고를 말한다.
6.25 전쟁 이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와 함께 붕괴사고로는 큰 인명피해를 안긴 사고 이다.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김영삼 정권 시대의 굵직한 기록으로 남겨진 참사이다.
32명이라는 사망자 수만으로 본다면 광복 이후의
인명참사 규모로 10위권 밖이다.
그러나 인명피해가 많은 사건들은 대부분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고속도로 위에서 차량이 충돌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어느정도 예상이 가능한 일이었던반면,
이 사고는 초거대 도시 한복판에 있는 멀쩡한 다리가
갑자기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충격을 가져왔다.

2. 사고 개요
1994년 10월 21일 금요일, 00시 20문 무렵과 02시 30분 무렵 1.3 X 2M 크기 철판이 성수대교 상판 이음새에 깔려 있음을 당시 운행하던 운전자들이 목격한다.
상판 이음새 부분에 심하게 벌어진 틈새를 덮으려는
서울시의 땜질식 응급 조치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균열을 커져갔고 사고 당일 새벽 6시 무렵 성수대교를 통과하던 차량의 운전자는 이음매를 지날 때 충격이 너무 커서 서울시에 직접 신고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교량진입 통제 등 긴급조치를 취하지 않아 결국 비극적인 대형 참사가 일어나고 만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 성수대교의 제 10, 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48m가 붕괴된다.
사고 부분을 달리던 기아 베스타 승합차 1대와 기아 세피아, 기아 프라이드 승용차 각 1대는 현수 트러스와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고, 붕괴되는 지점에 걸쳐있던 대우 르망, 현대 엑셀 승용차 각 1대가 물 속으로 빠졌으며, 운전자를 포함한 동승자 3명은 모두 사망한다.
이후에 한성운수 소속 16번 시내버스는 버스기사 유모씨가 붕괴 지점을 발견하고 최대한 급브레이크를 밟았는데도 전륜은 교량 밑으로 내려가고 후륜이 붕괴 부분에 걸쳐 있다가 무게 중심을 잃고 차체가 뒤집어지면서 추락한다.
그 추락 과정에서 버스 창문에 달려있던 창틀과 창살은 버스가 상판쪽으로 뒤집힐 때 큰 충격을 받아 교량 밖으로 날아간다.
이때문에 졸지에 몸이 뒤집혀진 승객들은 일제히 비명과 함께 버스천장에 부딪히며 두개골이 깨졌고, 일부는
차체에 사정 없이 부딪히면서 팔과 다리가 찢겨 나갔다. 그 이후 참혹하게 목숨을 잃은 승객의 시신과
피범벅이 된 유품들이 많이 발견된다.

결국 버스 1대, 승합차 1대, 승용차 4대 등 모두 차량 6대 탑승자 49명이 추락했고 이 중 32명이 사망한다.
사상자 대부분이 거꾸로 뒤집혀서 추락한 16번 버스에서 발생하게 된다.
승객 30명과 버스 기사 1명 중 사망자는 무려 29명,
생존자는 단 2명 뿐이었다.
거꾸로 뒤집혀서 추락하지 않았다면, 중상자는 있었어도 상당수 살 수 있었을 것이기에 안타까운 사고 였다.
승용차 사망자는 3명인데 구조대가 빨리 왔거나 한강으로 추락하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살 수 있었다.

마침 사고 발생 시각이 아침 출근 및 등교시간이라 등교하던 학생들을 비롯해 출근하던 직장인과 교사 등
평범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그 버스를 타고 아침에 등교하던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1명과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이 이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이 참사로 여학생 9명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나 무학여중고는 한동안 초상집 분위기었다.

그 밖에도 서율교대 재학생이던 이승영(당시 20살)씨는 교생 실습을 가느라 역시 16번 시내버스에 탑승했다가 그 사고로 인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후 장기 기증을 원했던 고인의 뜻을 가족들은 지켜주고자 했으나 장기기증 시한인 사망 후 6시간을 넘기고서야 시신이 수습된다.

3. 사고의 원인
현재 공식적으로 발표된 성수대교의 붕괴 원인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1. 교량 최초 시공사인 동아건설의 책임 부분

유효단면적의 감소와 응력집중을 유발하게 한
용접시공의 결함과 제작오차 검사 미흡이 문제가 된다.
성수대교가 지어졌던 1970년대에는 파격적이었던 트러스 공법이 쓰였는데,설계와 시공이 미흡했고 유지보수도 부실했다.
MBC가 사고현장의 수중촬영을 하였는데, 트러스의 강도만큼 중요한 볼트가 손으로 뺄 수 있을 정도로 허술했고 볼트 구멍도 제 멋대로 뚫려 있었다.

2. 교량 보수 및 관리기관인 서울특별시의 책임 부분

A) 피로균열의 진전을 예방하지 못한 점검 및 유지관리 미비
B) 급속도로 증가하는 차량통행량에 대비하지 못했다.
하루 통행량을 8만 대 정도로 설계했지만 실제 통행량은 그 두배가 넘는 16만대 이상이었고 게다가 붕괴 전해인 1993년 동부간선도로의 강북구 구간이 개통되면서 교통량이 폭증했는데, 당시 서울시는 하중제한만 낮추는 형태로 대처하였고, 제대로 단속도 하지 않았다.
C) 피로균열을 가속화시키는 규정 이상 중량차량 통행 규제가 소홀했다. 18톤 하중으로 설계되었으나 성수대교 북단에는 바로 삼표산업 레미콘공장이 있었다.
대당 중량이 최대 25톤에 이르는 레미콘 믹서들이 아무런 규제 없이 통행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인 견해로는 동아건설보다
서울시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보고있다.
동아건설이 성수대교를 건설한 다음 5년간
안전을 관리하는 계약을 충분히 이행했다.
이후에는 서울시가 안전관리를 맡았지만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3. 건설업계의 능력 부족

성수대교는 경간 중간부(문의 경첩과 같은)에 흰지를 넣는 게르버보 형식으로 건설되었다.
구조계산이 쉬워 당시에 많이 사용하는 구조형식이었다.
​구조계산에 필요한 수치 중 '부정정차수'라는 것이 있고
부정정차수가 높아질수록 구조해석을 하는 데
필요한 계산량이 오르게 된다.
오늘날에는 컴퓨터가 발달해서 구조해석이 쉽지만,
당시에는 부정정차수가 높으면 슈퍼컴퓨터를 이용하더라도 해석에 걸리는 시간은 엄청나게 늘어날수 있다.
그런데 구조계에 흰지를 넣으면 부정정차수를 한 단계 낮출 수 있고, 게르보 형식은 부정정차수가 0인 정정구조물이었다.

정정구조물은 구조적으로 안전하고 구조계산 방식이 간단해서 펜과 계산기만으로도 빠르게 계산할 수 있다.
하지만 부재(Member)가 하나라도 파괴되면 구조물
전체가 붕괴되는 위험을 내포하게된다.
직관적으로도 교량 중간에 흰지를 넣으면 위험함을 알 수 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성수대교였다.

4. 사고 조치 및 결과
사고 당일 이영덕 국무총리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오후 7시에 참사의 책임을 물어 이원종 서울특별시장이 문책성 경질을 당한다.
참으로 얄궃게도 이원종이 서울시장으로 발탁됨은 그가 충청북도지사 시절인 전년도 1월에 발생한 우암 상가 아파트 붕괴사고를 잘 수습한 솜씨가 높이 평가받은 덕이라고 한다.

새로운 서울시장으로 당시 경상북도지사였던 우명규 지사가 서울특별시 시장으로 긴급임명된다.
그러나 우명규 신임 시장이 성수대교 건설 당시
서울시 책임자(서울특별시 건설본부장)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11일만에 자진사퇴한다.
사고 당시 시기가 지방자치제 부활 이전이어서 이처럼
발빠른 인사이동을 할 수 있었다.
결국 다음달 3일 여당 전국구 의원 최병렬이 새로 부임한다. 성수대교 붕괴참사를 계기로 부실시공을 막겠다는 의지표명으로 나름대로 의지를 가지고 일했지만, 임기 종료 하루를 앞둔 1995년 6월 29일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나고 만다.
민선으로 당선된 조순 신임 시장의 취임이 7월 1일이었기 때문에 경질되지는 않았지만 최병렬 역시 서울시장으로서 대형 참사의 책임을 안고 불명예스럽게 이임한다.
동아건설은 사고 직후 성수대교 시공 후 5년 간 하자보수를 성실히 해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발뺌했지만, 여론의 뭇매를 맞고 결국 사과광고를 일간지에 게재한다.
수습이 마무리 되면 1500억원을 들여 전면 재건설하고,
한강 교량의 전면 보수 및 관리를 위해 100억원을
서울시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악화될 대로 악화된 여론에 다시 한번 뭇매를 맞는다.

결국 시민들의 정서를 감안해 새로 건설하기로 결정.
1995년 4월 26일부터 국내 최고의 시공 능력과 실적을 가진 현대건설이 새로 건설하기 시작해 1997년 7월 3일 완서오디어 차량통행이 재개된다.
해외 감리업체가 국내 최초로 해외 감리업체 자격으로 시공 감리에 참여하여,
국내 감리회사와 공동으로 시공감리 업무를 담당한다.
당시 부실시공이 국내 감리사와 시공사의 담합이나 뇌물수수 등 비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사고 발생 7년 후, 대법원은 본 사고의 직접적 원인이 동아건설의 부실시공 때문이라고 확정 판결을 내린다.
그리고 동아그룹 자체도 2001년을 끝으로 완전히 해체되면서 동아건설도 프라임개발을 거쳐 현재 SM그룹 계열이 된다.

728x90
반응형

댓글


loading